#1 새로운 무언가가 시작하는 때 사라지고 싶어지는 걸까
영웅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한 시대의 흥망이 늘 그렇듯 젖과 꿀이 흐르던 태초의 영광은 역사의 한 발자취로 남게 되었을 뿐 머지않아 인간의 욕심으로 발에 채 굴러다니는 말라붙은 풀뿌리만 못한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대지는 산 자의 곡소리와 죽음만이 도사리는 장소로 변모하였다. 예언자는 울부짖으며 낡은 종이가 예지했던 구원자만을 기다린다. 희망이 없는 세상이다. 누구도 타파할 의지조차 꺾인 사회. 그런 메마른 땅 위로 그가 걸음을 옮긴다. 영광스러운 이름이 증명하듯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천지가 개벽하고 마른 샘이 강을 만든다. 길 잃은 어린양이 목을 축이며 그의 이름을 칭송한다. ‘세상이 호걸을 사랑하면 호걸도 세상을 사랑하리라!’ 시인은 하프의 현을 퉁기며 노래하듯 영웅의 권세를 읊는다. ‘이자만이 난세를 일으킬 희망이며 열쇠요, 빛이며 소금이다!’ 끊임없는 군중의 행렬이 그를 맞이한다. 시선이 지나가는 곳마다 깊이 고개를 조아린다. 제발 어리석은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십사
부욱. 일순 세계의 틈이 벌어지며 종이가 찢기듯 순간이 뜯겨 나간다. 거북한 칭호와 더없이 부풀려진 영웅담 역시 형태소 단위로 분해되어 완전히 흩어진다.
“지루해.”
그 앞은 의미 없는 글자들의 군집이다.
“비범한 출생과 백성 위에 군림하는 메시아는 유행이 지났어. 그것도 한참 전에. 걸음마 떼자마자 나뭇잎을 타고 강을 건너시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어 던지는 권능 따윈 이미 웃음거리일 뿐이라고. 하다못해 이 분야 대표적 레퍼런스의 현신인 예수도 가장 낮은 곳에서 납셨음을 표방하고 있잖아?”
누군가에 의해 촘촘히 짜여 방향성을 만들어야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빛을 잃거나 잃어가거나 머지않아 잃어버릴 것이거나. 비선형적인 나열은 흡사 오로라와 같아 보였다. 그 틈새로 주인공은 발$#@?..
“아니야. 강세가 부족해.”
…그러니까, 주인공은 발걸음을 옮긴다. 현명한 독자라면 이 문장에서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이면 주인공이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니, 저런 거추장스러운 수식어에 집착하는 작자의 인생은 얼마나 편집증 적이고 시시하기 그지없을지
“사족이 그렇게 길면 아무도 읽으려 하지 않아.”
그러나 적절한 냉소와 자기비하적 농담은 어쩐지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잖아. 스테디셀러인 데엔 다 이유가 있다고. 이제 그는 거의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실험적인 시도라도 도를 넘은 난해함은 독자를 도망가게 하므로. 적잖이 나르시시스트인 그가 자신과의 대화에 심취하는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하자면, 지금까지 지칭해 온 그. 그러니까 ‘카도야 츠카사’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여기서 이야기란, 존재했거나, 존재하거나, 존재할 모든 이야기의 총칭으로 츠카사는 (무릇 주인공이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 법이나 적어도 그는 그것이 자신의 ‘진실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렇게나 규칙 없이 흩어진 언어를 조합하여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세계를 횡단한다. 그러면 그는 그 속에서 전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일 뿐이다. 그는 끊임없이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공상들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는 하찮은 종잇장 밖의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 양 발버둥 치다가도 배는 곯을지언정 영혼은 굶기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혼이라도 들린 것처럼 난해한 작품들을 쏟아내기도 하며 생을 이어갔다. 억지로 끊긴 생명줄을 새겨내듯 이어가는 삶에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이미 그만둔 지 오래였다. 츠카사 이전에도, 이후에도, 픽션은 존재한다. 불변의 법칙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면서도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 그것은 소금과 모래 위 지어진 성의 주인과 다를 바 없다고.
“이번엔 동정을 사려는 작전? 구식이네.”
그래, 또 시작이군. 최근 츠카사는 종종 자기연민 같은 한심한 감정이 제 안에 자리 잡으면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냉큼 찾아오고 마는 환청에 가까운 빈정거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모기소리 조차도 되지 못하는 하찮은 웅얼거림에서 시작된 소음은 가벼이 무시하고 지나칠수록 꼭 악에 받친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점점 몸집을 부풀리더니 이제는 억지로 무시하고자 해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지경으로 존재를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시나 무시로 일관한단 말이지?”
비꼬기에 유념 없던 음성은 돌아오는 답이 없자 두어 번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곧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훌륭해, 츠카사. 지금처럼 가능할 때까지 계속해서 상황을 회피해. 돌이킬 수 없도록 악화될 때까지 도망쳐. 그렇게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붕괴하는 꼴을 지켜보도록 해. 넌 언제나 그런 식이지. 지금까지도 그래 왔잖아? 싫어하는 음식과도 마주하지 못하는 주제에 영웅 이야기나 지어내는 꼴이라니 우습기 짝이 없”
“그만.”
게다가 마지막은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잖아? 아니, 애초에 그런 건 어떻게 안 건데?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황당함과 짜증을 숨길 의지도 없이 근원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일면식 없는 존재라기엔 순수한 악의로 똘똘 뭉친 비방을 정제되지 않은 채로 와르르 쏟아내는 행위가 아주 오래전부터 바라왔던 숙원을 이루는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어떤 비장함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게, 뉘신지는 몰라도 아주 단단히 척을 졌나 본데, 싶었다. 그런 감정이 일방적으로 형성되는 게 가능키나 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츠카사는 이 갑작스럽고 터무니없는 상황의 연속에 정신이 아득해져 의문의 음성에게 제 이름조차 가르쳐 준 적 없다는 꽤 중요한 사실을 뒤늦게서야 상기했다.
“이제서야 대답해 주는 거야? 역시 필요 이상으로 비싸게 구는 건 타고난 성격이구나?”
상대방의 반응 따윈 전혀 개의치 않은 음성은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저 녀석은 뭔데 날 저렇게 싫어하지? 나에 대해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뭐, 의문을 가지는 건 놀랍지 않아. 그런 일차원 적이고 덜떨어진 궁금증이라도 말이야.”
‘저 녀석’은 대화를 시도하려는 의도보단 신랄하고 악의가 철철 담긴 문장들을 생각나는 그대로 토해내는 것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별수 없는 일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달리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리고,”
알고 있다. 실은 중요한 사실에서 쭉 눈을 돌려왔으니까.
“하나 더, 저 녀석만큼은 왜 내 의지대로 지워버릴 수 없을까?”
그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거잖아? 네 완벽한 세계는 사실 한참 전부터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걸.
“젠장. 알았어, 알았다고.”
일단 나와서 얘기해. 실패한 전능자는 (이제 해당 표현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서도.) 항복의 의미로 가벼이 허공에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제야 날카로운 웃음이 더 이상 어떤 결과물도 남지 않은 공허에 찢어지게 울린다. 츠카사는 아주 질려버렸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설설 저었다.
#2 아무것도 모르는 브라운관의 밖에서 살아 있었던 거구나
빠르게 문자들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연속성 없이 나열되었던 개별의 것이 서로를 만나 덩어리져 형태를 만들어낸다. 유감스럽게도 당사자는 이 순간을 그리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그러든 말든 이 세계에서 츠카사의 의지가 아닌 단 하나의 피조물이 눈앞에서 역사적인 탄생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아, 최고야. 그는 반감이 역력한 목소리로 혼자 빈정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츠카사는 실내라는 말이 무색하게 군데군데 깨진 아스팔트 사이로 잡초가 무성히 자라는 폐건물 안에 발을 붙이고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중앙에 놓인 오래된 카메라가 보였다. 그래서, 이게 너라고? 덩그러니 놓인 카메라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얼이 빠진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면 도저히 한심해서 상대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음성이 뷰파인더를 봐. 건조하게 대꾸한다.
너머엔 쭉 뻗은 테라스가 자리 잡고 있다. 아니다, 관람석? 이건 오페라 하우스의 귀빈석에 가까워 보였다. 차이점은 굳이 쌍안경을 눈에 대지 않아도 무대 위 촌극이 선명히 보인다는 점 정도였다.
- 남자는 방 한켠에 자리한 작은 스툴에 앉아 어린 소녀의 연주를 듣고 있다. 그랜드 피아노의 건반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던 손은 실수 없이 마지막 음계를 연주하고 나서야 가벼이 무릎 위에 안착한다. 박수 치는 남자에게 소녀는 대답한다. ‘드뷔시의 달빛이야.’
- ‘같이 가요!’ 눈에 띄는 색의 비니를 쓴 여자는 달려가 앞서 휘적휘적 걸어가는 남자의 어깨를 붙잡는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눈빛에도 꿋꿋이 옆에 붙어 서며 덧붙인다.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절대 혼자 가게 두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동료잖아요?’
“생각보다 별거 아니네.”
무대가 암전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는 겨우 그렇게 뱉었다. 별거 아니네. 꽃말은 음, 전혀 별거 아닌 게 아니야. 그렇게라도 뱉어야만 별거 아니게 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이의 언어다. 카도야 츠카사는 존재 이후 처음으로 자신이 해변 위 굴러다니는 모래알 하나만큼이나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자신이 낱낱이 해부되어 타인에게 전시된 듯한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저는 애초에 보여지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위 촌극은 바로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투사해 왔던 다른 삶 그 자체였으니까.
“왜 그러고 멍청히 있어? 와서 앉아.”
네가 뭐 면접관이라도 돼? 평소라면 비아냥 섞인 대꾸를 뱉고도 남았을 테지만 별말 없이 순순히 의자로 향했다. 무어라 쏘아붙일 의지는 그만의 공간에 타인이 침범했을 때부터 이미 박탈당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깨달음이 너무 늦어버린 거고.
보이는 것만큼의 안락함을 주지는 못하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면 곧 츠카사의 옆자리를 꿰차는 존재가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깡마른 남자였다. 딱 붙는 바지와 자켓을 입고 있었는데, 몸을 두른 그것들이 오히려 그를 더 앙상하게 보이도록 만들기만 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붕괴의 시작이라기엔 그는 지나치게 불안정하고 나약해 보였다.
“낯짝 한번 보기 어렵군. 오페라의 유령이라도 상대하는 줄 알았어.”
그럼 나의 역할은 크리스틴이라는 뜻인가. 츠카사는 무대 위에서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관중을 향해 노래하는 한 명의 디바가 된 저 자신을 떠올리다 곧 그만뒀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실없고도 끔찍한 상상이었다.
“불필요하게 공격적인 말투를 보아하니 준비한 게 마음에 들었나 봐, 츠카사.”
츠카사, 여상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저 말투나 얼굴은 분명 초면일 텐데도 츠카사는 분명 그를 알고 있었다. 순간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있었다. 카이토, 카이토 다이키. 그리고 다른 사실 또한.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츠카사. 어째서 죽으려 드는 거야?”
돌이키기엔 그 이름을 너무 늦게 기억해 냈다는 것. 무어라 대꾸하려 입을 벙긋거릴 틈조차 주지 않고 그는 말을 이었다.
“가끔은 그런 형편없는 도피 계획을 진심으로 고민하는 널 찌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넌 그럴 용기도 없는 겁쟁이잖아. (아, 참고로 반박이라거나, 형편없는 핑계로 날 자극할 생각은 말아줬으면 해. 지금 품에도 하나 있거든. 카이토는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덧붙이며 가슴팍을 가벼이 두드렸다.) 하지만 그건 곧 내 죽음과도 같다는 뜻이겠지. 넌 이 빌어먹을 세계의 주인공이니까.”
그리고 난 죽고 싶지 않아. 카이토 다이키는 숨을 쉬고는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한바탕 쏟아낸 후에 힘없이 덧붙였다.
“네가 형편없고, 이 세계 하나를 책임질만한 자격이 없는 주인공이라도 난 받아들여야만 해. 그러기로 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스포트라이트가 닿지 못한 곳의 그늘을, 브라운관의 밖을, 조명받지 못한 나의 발버둥을 제대로 마주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삶의 책임감을 느껴.
그제서야 울 것 같은 표정에 시선이 닿았다. 눈이 마주친 첫 번째 순간이었다.
最後のサヨナラは他の誰でもなく
마지막 인사는 다른 누구도 아닌
自分に叫んだんだろう
자신에게 외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