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 고세이저 tv판 방영 목록과 단독 극장판 이외 vs 시리즈 등의 설정과 스토리는 제외합니다.
에리는 여름에선 땅이 타오름 직한 냄새가, 겨울에선 냉동실 냄새가 난다고 별로라 했다. 함께 하던 어린 시절부터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계절은 꽃피는 봄날. 살아있는 것들이 긴 잠에서 기지개를 켜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색색이 물들어 찬란한 제 자태를 뽐내는 봄이었다. 더우나 추우나 훈련에 매진하는 랜딕족의 남매 둘은 가을을 가장 좋아했다. 이유는 명료했다. 시원해서 훈련하기 좋으니까! 모네는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그녀답게 시원스레 답했고 그녀의 오빠도 어깨를 으쓱이며 공감을 표했다. 에리가 눈을 반짝이며 하이드는 여름이 제일로 좋지? 묻자 하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겨울.
으에? 왜? 여름이 바다를 즐기기 제일 좋잖아!
여름엔 피서객들이 많이 몰리잖아. 겨울에는 사람이 적어서 바다가 더러워질 일이 없지. 바다에게도 쉼이 필요해.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태연히 대답하는 하이드에 와... 정말 대단한 사랑이다 하이드. 모네가 팔짱을 끼곤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빛바랜 추억을 회상하던 아라타는 살풋 웃었다. 소년스럽던 그의 얼굴엔 어느덧 잔주름이 자리 잡아 지나온 세월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조차 모르겠다. 아라타는 그때의 야마치 박사보다도 나이를 먹었으며 노조무에게는 그때의 노조무보다도 자란 아들이 있었다. 이제 노조무에게 가장 소중한 건 그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라고 했다. 어른이 된 노조무를 만날 때마다 에리는 질리지도 않고 늘 감격해했고 모네는 그런 에리에게 나이 먹고 호들갑 좀 그만 떨라고 채근하면서 별반 다르지 않는 얼굴을 지어 보이곤 했다. 다섯은 다시 만날 때마다 서로가 변한 것 하나 없다며 웃어댔다. 하도 반복되는 이 모습에 데자부라도 느껴질 정도였지만 결코 질리지는 않았다.
노조무는 자신의 아들이 말도 하지 못하던 때부터 그를 안고 어떤 영웅의 이야기를 했다. 이제 아빠 말이 질린다고 듣기 싫대요, 진짜 애들 빨리 큰다니까. 노조무가 투덜댔다. 노조무, 기억 안 나? 너 막 반항하고 그랬잖아. 메탈 앨리스한테 조종 당해서 우리 말도 안 듣고 박사님 뿌리치고! 에리가 소녀처럼 웃음을 터뜨린다. 아 언제적 얘길 하는 거예요, 에리 누나도 진짜... 노조무가 머리를 머쓱하게 긁자 에리와 모네가 마주 보고는 다시 웃어댔다.
노조무는 가끔 아쉬워했다. 그 영웅담을 아는 사람이 이 땅에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고세이저 여섯 밖에는 없다는 게 그렇게 아쉽다고.
아라타는 거울 앞에 선 제 모습이 퍽 낯설지는 않았다. 얼굴에 역력히 드러나는 세월은 전부 사랑으로 걸어온 날들이었다. 그래,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아라타에게 사랑하던 행성, 그리고 사랑해 마지않는 그 위의 존재들과 함께한 시간의 축적을 의미했으므로 절대 쓸쓸함, 아쉬움 그런 것과 같은 부류의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그가 느리게 손을 들어 콧잔등 옆에 생긴 주름을 쓸었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것들을 지나왔다.
가만히 어리던 날들을 돌려 감아 생각해본다. 어느 날 돌아보면 마냥 벅차오르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었다. 눈앞이 캄캄하던 때도 있었다. 펼쳐보면 이제는 웃을 수 있다. 지나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에 닿은 이야기였으니까. 가장 어리던 모네는 메모리 베리 카드를 들면서 모든 걸 우리끼리만 기억한다는 게 아쉽다고 채근하곤 했다. 우리만 기억한다면 그것으로 된 거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등 뒤로 하고 걸어왔는지.
그때에서 정확히 배로 나이가 드니 그들 사이의 기억도 온전치가 않았다. 가끔 누구 하나가 이야기를 꺼내면 누군가는 그런 일이 있었나? 되물었다. 처음 아그리가 그런 반응을 했을 때 아라타는 일기장을 사 집에 돌아왔다. 천천히 일기장의 표지를 손으로 쓸어본다. 분명히 늙어감이 아쉬운 적은 없다. 점점 빛이 바래가는 것들의 흔적을 잡기 위해. 아라타는 아주 소중히 하는 추억들이 자꾸만 바래간다는 것이 아쉬웠다. 사랑하는 것들은 영영 가슴에 끌어안고 살아가고 싶었다. 나이 먹고 욕심만 늘었네, 아라타가 작게 웃는다. 어린 날처럼 여전히 웃음에 온기가 스며 있었다.
글 앞에 언젠가부터 인지 '어린 날에는' 따위의 어구를 붙였다. 의식하던 순간 웃음이 났다. 수많은 나날이 지나고 가늠하지 못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런 어린 날들을 생각하곤 했다. 사랑과 사명만으로 살아가던 날들이 있었다. 사랑과 사명만으로도 살아지던 날들이 있었다.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날들을 떠올리면 미치게 애틋해져 오는 가슴은 어쩌할 도리도 없었다. 햇살이 따스히도 몸을 감싸오는 느낌을 받으며 아라타는 문밖으로 천천히 걸었다.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사람들.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는 제각자의 삶들.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이 세상은 끝도 없이 아름다웠다. 사랑에는 별 이유도 없었다. 어린 날에는 이유도 찾았지만 그저 그랬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아라타에게 이 행성과 사람들은 사랑함 직한 것들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고 그렇기에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사랑하는 것들과 사랑과 사명과 우리가 함께이던 그 어린 날.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그런 것은 그를 벅차고 애틋하게 했다. 아마 평생토록 이러겠지. 영원한 그의 첫사랑일 것이다. 아라타가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더없이 맑게 갠 하늘로 시선을 움직였다. 바람이 분다.
수많은 나날이 지나고 가늠하지 못할 시간이 흐른대도 어느 기억들은 마음 한 켠에 깊이 남아있기 마련이다. 아라타는 모든 게 그랬다. 이 땅에 발붙이고 인간의 숨과 자신의 숨이 섞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소중해져 버렸다.
라일락 향기가 괜스레 그를 추억 아래로 잡아 이끌었다. 평화만이 남은 지구는 심심할 정도로 조용했다. 지구는 영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아라타는 행성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지 않았다. 찬란하던 날들은 시끄러웠다. 어둠이 자주 손을 뻗었고 사랑하는 것들은 끊임 없이 위협 받았다. 그 장을 지나니 고세이저는 영웅이 되어 나서지 않아도 괜찮았다. 눈부시게 찬란하던 날이 그립기는 해도 다시 영웅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심플했다. 인간들이 불안을 잊어도 괜찮은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 점점 바래가도 상관 없었다. 그렇게 잊혀도 괜찮았다. 물론 누군가의 기억에 있던 적도 없었지만.
가장 찬란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이 땅에 발을 붙이고 그 후를 내내 걸을 수 있던 이유는 확신이었다. 우리의 삶은 이게 끝이 아니리라. 여섯 명의 고세이저는 영웅이기 때문에 빛난 것이 아니라 빛났기 때문에 여섯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림처럼 나란히 함께 걸었다, 여전히도. 걸을 길이 있는 한 찬란함은 영원할 것이다. 가장 빛나지는 않아도 그 내내 스스로 빛을 낼 것이다. 그렇게 계속 걷는 것이었다. 모두가 웃고 있는 책상 위 액자가 가을밤의 짧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아라타를 반겼다.
누군가가 잊어도 기억하는 것이 있다. 모두가 잊어도 기억하는 것이 있다. 그날들을 모아 뭉치면 그런 부류의 것이 되었다. 내가 사랑한 이야기. 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무수히 많은 것들의 이야기. 그것들을 모두 가슴에 끌어 안고서 우리는 다시 나아가겠지. 우리는 아는 이야기, 이 별이 아는 이야기. 우리가 사랑했던 모습을 우리가, 그리고 이 별이 알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계절은 향기를 더해가고 머리를 기댄 아라타의 눈꺼풀에 졸음이 쌓여간다. 노래가 울리는 동안 느리게 잠에 빠 지 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