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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하루 전 키류 센토가 전투 후 변신을 풂과 동시에 쓰러진 것에서 기인한다. 과로였다. 이에 대해 사와타리 카즈미는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허구한 날 밤을 새워가며 개발에 매진하고 전투에도 빠짐없이 나간 데다 정신적으로도 계속 몰아붙여졌으니, 몸이 버티질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그렇게 말하고서 판도라 박스 경호를 하러 나갔다. 이스루기 미소라는 죽은 듯이 잠든 센토 옆에 앉아 센토를 간호하고 있었고, 타키가와 사와는 늘 그렇듯 정보를 얻기 위해 밖에 나갔다. 그러면 이때, 사건의 또 다른 중추인 반죠 류우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하천 난간에 기대어 애꿎은 조약돌만 물속에 집어 던지고 있었다. 둔탁한 소음과 함께 이지러지는 물속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반죠 류우가는 생각했다. 키류 센토가 그렇게 쓰러질 때까지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막지 못한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나름 연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주제에 그의 짐을 나눠 들지 못 해준 것이 한스러웠다.

"바보 같아…." 평소라면 질색했을 말을 저 자신에게 내뱉고서 반죠 류우가는 등을 돌려 나시타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시간을 조금 뒤로 돌려 사건의 시작으로 옮겨가 보자.

의식이 물 밑에서 조금씩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조용한 나시타의 지하 기지 한 구석에 놓인 침대에서 키류 센토는 눈을 떴다. 깨질 것 같은 두통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센토는 얼굴을 찡그리며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침대 옆 책상 위에 놓여있던 물 한 잔을 들이켰다. 아마도 이스루기 미소라가 그를 위해 놓아둔 것인 듯했다. 그리고 비상한 두뇌를 굴려 쓰러졌을 때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었다. 쓰러지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자신 주변으로 흩날리던 붉고 푸른 입자와 흔들리며 추락하는 시야, 제 의식을 저 밑의 심해로 끌고 들어가는 어지럼증과,

"-센토!"

자신을 향해 소리치며 달려오던 제 파트너이자 애인.

달려오던 꼴이 퍽 애절해 보였는데 말이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물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린 키류 센토는 잡념의 주인공과 마주했다.

"아, 반ㅈ-"

빠른 걸음으로 센토에게 다가온 류우가가 센토의 말을 끊고 멱살을 잡았다.

"센토 너-"

이내 반죠를 밀쳐낸 센토가 얼굴을 굳히고 반문했다.

"반죠, 이게 무슨 짓이야?“

격양된 표정의 류우가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씨근덕댔다.

"맨날 히어로라며 혼자 나서다가 이게 뭐야? 꼴사납게 쓰러지기나 하고. 세상 혼자 사냐? 왜 맨날 전부 네 잘못이라면서 다 끌어안는데? 야, 네가 신이냐? 하느님, 부처님, 센토님이시네 아주? 히어로 행세 그만 좀 하라고!"

격양된 류우가가 센토의 어깨를 잡고 숨 쉴 틈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 말엔 걱정과 자책 등이 섞여 울음과 토해졌으나 불운하게도 센토에게는 그 감정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는 센토의 마음을 헤집고 찢어놓기에 나무랄 데 없었다.

"-악마의 과학자 주제에!"

"하?"

반죠 류우가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저 자신이 더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뱉어서는 안 될 말이었는데. 머리가 굳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뒤로 돌아 도망쳤다.

평소였다면 키류 센토는 반죠 류우가의 격양된 말 속에서 걱정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밀려들어 오는 어지럼증과 찌르는 듯한 두통이 그의 머릿속을 흐려놓다 못해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센토는 반죠의 말 속에서 걱정과 자책을 읽어내지 못한 채 분노와 자기혐오의 구렁텅이 속에 빠졌다. 키류 센토는 이마를 짚고 가만히 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비어져 나온 피가 혀를 적시고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두통이 가라앉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본디 미약한 고통이 더 큰 고통을 몰아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때 이스루기 미소라가 조용히 계단으로 내려왔다.

"센토? 일어났구나…." 이스루기 미소라는 잠깐 뜸을 들였다.

"너희 무슨 일 있었어? 아까…“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레 물어오는 이스루기 미소라에게 키류 센토는 굳은 목소리로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답한다. 당연하게도 이스루기 미소라는 잔뜩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와 아까 전 얼핏 들린 몇 마디로 추론컨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음을 안다. 그리고…반죠가 뱉은 마지막 말도 들어버렸다. 그렇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 한마디에 속지 않았다. 필시 두 사람이 다툰 게 맞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늘 그렇듯이 어느새 싸운 것도 잊고 평소처럼 지내지 않을까-하고 안일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센토의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아 이스루기 미소라는 키류 센토에게 좀 더 쉬라는 말을 남기고 카페 1층으로 올라갔다.

이스루기 미소라가 나가고 혼자 남은 키류 센토는 아까 반죠 류우가가 내뱉은 말을 다시 혀끝에 내어 굴려보았다. 악마의 과학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은 인체 실험을 자행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만든 살상 무기를 개발한 악마의 과학자였다. 비록 자신이 기억조차 못 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제 손으로 저지른 죄에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센토는 아까부터 저를 괴롭히는 두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손에 닿은 이마가 조금 뜨거운 것도 같았다. 속이 뒤집히는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번에는 시점을 바꾸어보자. 아까 뛰쳐나간 반죠 류우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반죠 류우가는 현재 거리를 하염없이 뛰고, 또 뛰고 있었다. 전쟁의 상흔이 깊게 남겨진 거리는 사람 하나 보기도 어려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날씨는 아주, 아주 맑았다. 빌어먹게 좋은 날씨였다. 겨울임에도 따뜻한 햇살이 여기저기 망가진 아스팔트 도로 위에 내리쬐고 있었고, 쾌청한 하늘은 사람 속도 모르고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파아란 하늘이었다. 이미 나시타는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반죠 류우가는 무언가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듯 뜀박질을 계속했다. 그렇게 10분쯤 뛰었을까, 지쳐 길가에 보이는 놀이터 미끄럼틀에 널브러진 류우가는 숨을 몰아쉬었다. 실수했다. 그런 말 따위 내뱉는 게 아니었는데. 그 녀석 얼굴을 보자마자 어저께부터 계속 생각했던 걱정과 자책등의 감정이 용솟음쳤다. 그렇지만 그 끓어오름을 통제하지 못한 것은 온전히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 결과로 그 녀석한테 쏟아낸 그 말에게 센토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데여버렸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키류 센토가 화살을 말을 내뱉은 제가 아니라 센토 그 자신에게 돌릴 것을 알고 있기에 더 후회스러웠다. 그 녀석은 지금 자신이 누워있는 놀이터가 놀러 나온 아이들 하나 없이 엉망이 된 것도 전부 제 탓이라고 생각할 인간이니까. 아무래도 자신은 바보가 맞았다. 키류 센토가 얽매인 것들 때문에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못마땅했다. 그리고 걱정되었다. 그런데 왜 키류 센토가 지금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알고서도 사실대로 걱정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을까. 자책과 슬픔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이 만든 굳어 무표정한 얼굴이 미소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미소는커녕 센토의 얼굴을 더 어둡게 만들어버렸을 뿐이다. 아무리 후회해도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사실만이 시린 겨울 햇살과 함께 류우가를 뒤덮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이틀 뒤.

이틀 동안 반죠 류우가와 키류 센토는 말 한마디도 섞지 않았다. 정확히는 반죠 류우가가 키류 센토를 피하는 모양새였다. 반죠 류우가는 이틀 내내 나시타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고, 키류 센토는 평소의 활달함을 가장하려고 노력했으나 묘하게 어딘가 꼬인 것 같은 분위기를 내며 실험에만 집중했다. 사실 이틀 전 일은 해저드 트리거의 폭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복잡한 마음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일이었을 뿐, 근본적인 문제는 둘의 마음속에 시한폭탄처럼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시타에 짙게 내려앉은 겨울의 한기에 이스루기 미소라는 한숨을 쉬며 타키가와 사와에게 이틀 전의 일을 털어놓았다.

"…그 뒤로 두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한 지 벌써 이틀째야."

"늘 그렇듯이 아무 말도 없이 다시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까?"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아무리 사랑싸움이라지만 전처럼 시끄럽게 왁왁대는 게 아니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야…“

이스루기 미소라는 재차 한숨을 쉬며 바 테이블에 엎드렸다. 타키가와 사와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센토가 쓰러진 것 때문에 둘이 싸운 것 같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역시 반죠는 센토가 걱정되어서 화낸 게 아닐까?"

미소라가 엎드린 채 사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둘이 했던 말을 조금 들었는데…반죠가 센토가 무리해서 쓰러진 일에 대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내버린 것 같았어. 그러다가 뭐…"

미소라가 빨대로 주스를 휘저으며 답했다.

"하긴…반죠 성격상 홧김에 센토한테 상처되는 말을 내뱉는 일도 무리는 아니고…“

사와가 제 앞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센토도 요새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한 거 같고…. 확실히 센토가 무리하고 있는 것도 맞으니까…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간 터졌을 문제였을 거야."

사와의 답에 미소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줘서 고마워, 사와씨."

"아냐, 당연한 일인걸. 미소라 네가 저 둘 사이에서 늘 고생이 많아."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바 테이블에 엎드린 채 빨대로 주스를 마시는 미소라의 등을 사와가 재차 토닥여주었다. 그때, 센토가 지하실에서 나와 의자에 걸쳐놓은 코트를 챙기고 문 쪽으로 향했다.

"센토, 어디가?"

"B-5 구역. 로그가 나타났대."

"그렇구나…조심해서 다녀와."

미소라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가벼운 고갯짓으로 답한 센토가 나시타를 나가고, 다시 둘만 남은 미소라와 사와는 잠깐 센토가 둘의 대화를 들었을까 걱정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기 시작했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둑한 나시타의 창가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살은 겨울의 추위를 잠시 잊게 할 만큼 포근하고 따스했다.

 

"여어-센토!"

키류 센토는 이미 전투에 돌입해 한창 교전 중인 사와타리 카즈미가 크게 소리쳐 부르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변신!"

달려 나가는 센토의 옆으로 잔뜩 흔든 탄산이 터진듯 붉고 푸른 거품들이 톡톡 터져나갔다. 래빗 탱크 스파클링-이예이! 언제나 빌드의 변신음은 밝고 유쾌하다. 장착자의 감정과는 관계없이.

빠르게 달려 나가며 카즈미의 앞에 있던 서구군 가디언에게 유효타를 먹였다. 나이스 센토!하고 시원스레 외치는 카즈미한테서 눈을 돌리니 평소보다 둔한 움직임으로 주먹을 날리는 류우가가 눈에 들어왔다. 꼭 다른데 정신이 팔린 것처럼 움직임이 산발적이고 군더더기가 많았다. 평소의 반죠 류우가답지않은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반죠는 반죠인지라, 아스팔트 도로 위에 쌓여가는 박살 난 가디언들의 잔해의 수는 꾸준히 늘어가고 있었다.

키류 센토는 아까 미소라와 사와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걱정. 알고 있다. 사실 평소라면 그냥 삼켰을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반죠가 내뱉은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도 있고, 사소한 일로 싸운 건 수없이 많았다. 저를 피해 나가는 반죠를 막아 세워 대화 좀 하자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역시 본인이 조금 지쳐있었던 것 같다고 키류 센토는 생각했다.

키류 센토는 잠깐 복잡한 머릿속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전투 중에 상념에 빠지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각을 곤두세워도 모자랄 전시 상황에 딴생각을 하는 것은 곧 제 목을 내놓는 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총탄이 센토의 옆을 스쳤다. 재빠르게 몸을 돌려 총탄의 주인이 로그임을 확인한 센토는 입술을 한 번 감쳐물었다가 사와타리 카즈미를 향해 소리쳤다.

"해저드를 쓸 거야, 엄호해 줘!"

카즈미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해저드 트리거는 센토로써는 정말로 손도 대고 싶지 않은 존재였지만 피해를 최소화하며 빠르게 적에게 유효타를 입힐 수 있는 수단이 지금으로선 해저드 트리거가 유일했다. 유일했기에, 더 비참했다. 트리거의 스위치를 누르자 귀에 익은 구동음이 흘러나왔다. HAZARD ON- 묵직한 기계음 뒤에 경쾌한 멜로디가 따라붙었다. 키류 센토는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따라붙는 이 멜로디가 정말 기괴하고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이성 없는 살인 병기로 만드는 버튼을 누르면 이리도 경쾌한 음이 출력된다니. 이런 걸 만든 과거의 자신은 정말로, 악마가 맞을지도 몰랐다. 레버를 돌렸다. 검은색 거푸집이 자신을 향해 달려올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Are you ready?

준비되지 않았다.

그러나 센토는 입술을 떼어, "Build up."이라 말했다.

스파클링 폼 위에 검은 해저드 폼의 슈트가 덧씌워졌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는 센토는 곧바로 로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로 주고받으며 이어지던 몇 번의 공격 끝에 센토는 로그에게 유효타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물론 공격에 성공했다는 기쁨이나 성취감 따위를 느낄 시간은 없었다. 의식이 저 밑의 심해로 끌려가는 끔찍한 감각이 센토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폭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찔한 기분과 함께 시야가 흔들리고 의식이 고장난 전구처럼 깜빡거렸다. 이 감각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다고 생각하며 키류 센토는 입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단 1초라도 더 버텨보겠다는 발악이었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릿한 고통과 함께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의식은 계속해서 저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빛나는 파란색의 이펙트가 제게 다가오는 걸 보며 키류 센토는 눈을 감았다.

'잠깐, 파란색?'

의문을 가지고 다시 눈을 뜨기도 전에 센토는 강한 충격과 함께 바닥을 굴러야만 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트리거와 보틀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폭주에 잡아먹히기 직전, 반죠 류우가가 키류 센토의 벨트를 향해 라이더 킥을 날려 강제로 변신을 해제시킨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센토에게 다행스러운 소식이 있었는데, 해저드 폼의 폭주는 로그와 서구군에게도 달가운 일이 아니라 로그와 서구군 또한 급히 퇴각했다는 점이었다. 센토는 흩날리는 금색 입자와 함께 내밀어진 카즈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카즈미에게 짧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

"고맙기는 뭘. 나는 이 바보 녀석과 따로 할 일이 있으니 센토 너 먼저 나시타로 돌아가."

그렇게 말하며 사와타리 카즈미는 반죠 류우가를 향해 가볍게 턱짓했다. 키류 센토는 의아했지만 이내 그러려니 하고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오라 말하곤 발걸음을 돌렸다. 센토가 떠난 후, 카즈미는 그때까지 멍청하게 서 있던 반죠 류우가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스팔트 길옆 버석하게 마른 잔디만 노려보며 걷는 류우가에게 카즈미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 너, 센토 녀석이랑 무슨 일 있었냐?"

사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건 아니었다. 사와타리 카즈미 또한 지난 이틀간 센토와 반죠 사이의 냉전을,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반죠 류우가가 키류 센토에게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양 은근히 피해 다니는 모습을 질리도록 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질문은 좋은 말 할 때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순순히 실토하라는 협박에 가까웠다. 머뭇거리던 반죠가 털어놓은 일련의 상황 설명을 들은 뒤 사와타리 카즈미는 반죠 류우가에게 "너 바보냐?" 라고 일갈했다.

"나도 후회하고 있는 중이라고…"

"센토 녀석이 걱정되는 네 맘은 알겠다만 이번 일은 네가 잘못했어. 짜샤. 안 그래도 이런저런 일로 마음 복잡할 애한테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 센토 그 녀석, 아마 자기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또 혼자 삽질했을 거다."

"알아!…그러니까 더 돌겠다고…."

한숨을 내쉬며 쪼그려 앉아 고개를 숙인 류우가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은 카즈미가 말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네 진심을 전달하고 사과해. 그러면 아마 센토도 받아줄 거야."

"그리고 원래 고마움과 미안함은 제대로 전하는 편이 좋다고."

"아아-그때 왜 그런 말을 해선…."

"어휴, 바보야."

"바보 아니거든?"

"넌 바보 맞아, 이 바보야. 내가 왜 네들 사랑싸움에 껴야하냐고. 니들이 자꾸 찬바람 날리고 있으면 미땅이 슬퍼할테니까 어쩔 수 없이 도와주는거야."

고개를 세우고 항변하는 류우가의 머리를 한 번 더 카즈미가 가볍게 쥐어박았다. 틱틱대는 어조와 다르게 말에 애정과 걱정이 담겨있었다.

 

불 꺼진 나시타의 내부는 어둑했다. 키류 센토는 카페 안을 가로질러 냉장고 문을 열고 지하 기지로 들어갔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

침대에 앉아 있던 미소라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센토는 의자에 코트를 걸쳐두고 평소처럼 커피를 한 잔 내려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컴퓨터를 켜는 센토를 미소라가 조심스레 불렀다.

"있잖아, 센토."

"응?"

"반죠랑 싸웠을 때 말이야…"

센토가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미소라가 이어 말했다.

"사실 너희 둘이 싸우는 거 조금 들었거든…. 아마 반죠가 했던 그 말이 진심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

"알고 있어."

센토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고."

약간 침울한 얼굴을 한 채 연신 손가락을 꼼지락대던 미소라가 입을 뗐다.

"센토."

"응."

"전부 다 너를 걱정하고, 또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가끔은 혼자 떠안으려고만 하지 말고 남한테도 좀 의지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도 너에게 짐만 되지 않고 도움이 되고 싶어. 뒤에 따라붙은 이 작은 바람은 아마 센토는 못 들었을 것이다.

미소라의 말에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센토가 이내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물론 정말로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키류 센토에게 이스루기 미소라는 의지하기보단 지켜야 할 대상이었으므로.

"미~땅"

그 때 사와타리 카즈미가 헤벌쭉 웃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스? 반죠는?"

"아직도 그리스…. 게다가 그 바보부터…."

시무룩해진 사와타리 카즈미에게 이스루기 미소라가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라는 듯 눈을 흘긴다.

"그래서 반죠는 어디 있는데?"

"바람 좀 쐬고 오겠대."

카즈미의 대답에 시계를 확인한 미소라가 말했다.

"어차피 오늘 식사 당번 그리스 너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면 늦진 않겠다. 센토, 반죠 좀 데려와 줄래?"

"어, 내가…?“

말끝을 흐리는 센토에게 미소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미소라의 의도를 이해한 센토가 알겠다고 답하고 코트를 챙겨 계단을 올라간다.

"헉, 미땅과 단둘이서 요리 이벤트?!"

"시끄러워-! 어차피 곧 사와씨도 올 거고!“

"…들렸어?“

"네 마음의 소리 말이야, 전혀 마음의 소리가 아니라고!"

냉장고 문을 닫아도 새어 나오는 둘의 대화에 키류 센토는 웃음을 흘렸다. 그들이 언제나 심각한 대화 대신 이런 이야기들만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미소라도 참…. 일부로 둘이서 대화할 시간을 만들어주다니."

오전의 사와와의 대화도 그렇고 이틀 동안 둘 사이에 껴서 미소라도 이래저래 마음고생을 했겠다고 생각하니 미소라에게 미안해졌다.

'어디에 있으려나….‘

센토는 우선 나시타 주변부터 찾아보기 시작했다. 겨울이 완연한 날이라 그런지 거리에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서둘러 찾지 않으면 주변이 더욱 어두워져 찾기 힘들겠다고 생각하며 키류 센토는 발걸음을 더욱 바삐했다.

그렇게 10분쯤 돌아다니다 키류 센토는 하천 옆 산책로 난간에 기대어있는 반죠를 발견했다. 반죠를 큰 소리로 부르려다 반죠가 자신을 보고 도망갈 미연의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반죠?"

"센토?!"

"너…. 왜 여기에?"

"미소라가. 저녁 시간이니 너 데려오래."

잔뜩 놀란 반죠의 표정과 달리 센토의 얼굴은 태연자약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네 진심을 전달하고 사과해. 그러면 아마 센토도 받아줄 거야.

'왜 이럴 때 바카즈밍 녀석 말이 생각나는 거야. 그렇지만…. 사과해야 하는 건 맞는데.'

생각에 잠겨 멍해있는 반죠를 센토가 재차 불렀다.

"반죠?"

"-미안해!"

반죠가 갑자기 소리치듯 내뱉은 사과에 센토의 표정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네가 이런저런 일로 고민이 많다는 거 알고 있었는데 홧김에 그런 말을 내뱉어버려서…. 변명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진심이 아니었어. 미안해."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 우물쭈물 사과를 건네오는 반죠를 보며 센토가 픽 웃었다.

"뭐야, 그걸로 여태 고민하고 있었던 거야?“

“괜찮아. 사실 내가 카츠라기 타쿠미였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그 정도는 감수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이번에 괜히 예민하게 반응했었던 것도 같고…."

반죠를 따라 난간에 몸을 기댄 센토가 볼을 긁적이며 답했다. 그 태연자약한 반응에 되려 반죠가 표정을 굳히고 쏘아붙였다.

"야, 너…. 난 네 말마따나 바보라서 그딴 복잡한 건 모르겠고, 넌 카츠라기 타쿠미도 아니고 사토 타로도 아니고 키류 센토잖아. 카츠라기 타쿠미일적 기억도 없고. 근데 왜 자꾸 다 떠안으려고 하냐? 막말로 네 잘못이 0%는 아니라고 해도 100%도 아니잖아."

말을 쏟아낸 반죠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이게 아닌데, 진짜 사과하려고 했는데, 진짜 바보같이…. 라고 중얼거리며 쪼그려 앉아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 말을 들은 센토의 표정이 한 번 더 놀람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빙그레 웃었다.

"고마워."

"엉?" 반죠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반문했다.

“아까 전에 폭주하기 전에 막아준 거.”

“아니 뭐…별 거 아니었어.”

반죠가 센토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반죠가 옷을 터는 동안 센토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항상 키류 센토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이제 집에 가자. 다들 기다리겠다."

센토가 제 할 말만 내뱉고 먼저 걸어가버렸기 때문에 반죠는 센토가 뱉은 말에 벙쪄있을 새도 없이 이미 앞서 걸어가고 있는 센토의 뒤를 쫓아 뛰어야만 했다.

"야! 같이 가!"

"바보야, 알아서 따라와."

"바보 아니라니까!"

"네네- 그러시구나~"

몇 없는 제대로 작동하는, 그마저도 깨진 것들이 대부분인 가로등이 군데군데 아스팔트가 박살 난 길을 은은히 비추고, 그 길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간다. 살짝 손을 겹쳐 잡았다가, 깍지를 끼기도 했다가 하면서. 닿은 마음의 끝에는 서로의 미소가 있다. 아마도 오래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황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고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오늘 서로에게 솔직히 털어놓은 것으로 이미 전력을 다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웃으며 만족하자. 언젠가는 서로의 마음이 100% 전해 닿길 바라면서.

 

-キミに 100パーセント

특촬 플레이리스트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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