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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해진다는 것에 관하여

 

(※ ‘가면라이더X가면라이더 위자드&포제 MOVIE 대전 얼티메이텀’의 일부 스포일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본 연성에는 위 작품과 ‘가면라이더 포제’ 본편에 등장하지 않는 설정이 등장함을 알려드립니다.)

 

 

빗방울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창문에 빗방울이 떨어져 내릴 때마다 물때가 남았고, 뒤이어 쏟아지는 빗방울이 그 길을 따라 떨어져 내렸다. 한 시간 전에는 우산 없이 나가도 괜찮을 정도로 적었던 강수량은 이제 우산 없이는 앞을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아졌다. 벌써 10분 거리에 있는 건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시거리가 좁아진 상태였다. 토모코는 서재 방 창 근처를 서성거리며 팔짱을 꼈다. 술렁거리는 마음은 그런데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입에 댄 차가운 커피는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 뿐이었다.

토모코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가져다 댔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빗소리가 더 선명하게 귀에 들려왔다. 최근 편집부 사람들과 불화가 있던 건 아니었다. 독자들에게 쓴소리를 들은 것도 아니었고, 평론가에게 혹평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과 다르게 토모코는 자신을 향한 비방, 혹은 작품을 향한 비판을 구분할 수 있었고 그것들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배웠다.

‘그러면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걸까?’

타인의 마음과 달리 자기 마음은 아무리 감이 좋다 해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더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혼란스러워지는 게 자기 마음의 특성이었다. 토모코는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의 마음이 무얼 말하려고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한참 눈을 감은 후에야,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토모코의 서재는 그 주인의 취향에 맞춰 대부분의 가구가 검은색이나 짙은 갈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물론, 방 안이 어둡기만 하면 우울할 테니 큰 창이 토모코가 마감하는 자리 뒤쪽에 놓여 있었고, 별과 달을 테마로 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조명도 꽤 밝은 것으로 골라놓았다. 밤에 불을 켜면 서재는 집에서 가장 밝은 방이 되곤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비가 오는 어둑한 날에 불도 켜지 않고 있으면 꼭 굴속처럼 어두웠다. 오직 노트북의 어슴푸레한 빛만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노트북 화면에는 메일 전송에 성공했다는 문구가 떠 있었다. 그 문구가 뜬 이후로 토모코는 창을 닫거나 다른 창을 켜놓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여가 흐른 지금, 토모코는 이 창을 보고 왜 이렇게 심란해졌는지 그 답을 찾았다. 기실,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글을 시작할 때는 막연한 불안감과 기대감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중간중간 풀리지 않는 문장과 단어의 실타래를 마주할 때면 그만두고 싶단 마음이 생길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만두지 않아서 다행이야. 토모코는 생각했다.

어떻게 글을 시작하든 끝을 내자. 데뷔하고 난 후로 토모코가 스스로와 약속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완성한 글이 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았겠지만, 대중에 내놓을 수 있을 법한 글보다는 USB 한구석에서 잠들어 있는 글의 수가 더 많았다. 그래도 내놓을 수 있는 글이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인가? 그 점을 위안으로 삼으니 마음이 조금 편해지긴 했지만, 허무한 마음이 남은 것도 사실이었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기분. 언젠가 독립을 결심했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몇 번 더 고쳐야 하겠지만, 글을 완성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토모코는 시원섭섭한 감정을 매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열심히 만든 종이배를 또 저 멀리 띄워 보내는 것만 같아서.

다행스럽게도 왜 허무했는지 온전하게 이해하고 나서야 토모코는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서재의 불을 켜고, 예전에 류세이가 가르쳐준 대로 스트레칭을 했다. 쿠키를 몇 개 가져와 먹고는 커피로 입가심까지 했다. 묘한 열기가 몸을 감쌌다. 뭉쳐있던 근육이 풀렸다는 증거였다. 그런 식으로 자기만의 의식을 마치고 나면 토모코는 꼭 류세이에게 메일을 보냈다. 일신상의 이유로 평소에는 꺼뒀을 번호로. 일기장처럼 쓰려던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류세이가 임무를 끝내거나 국내로 들어오면 핸드폰의 전원을 한 번쯤은 켤 테니까. 그러므로 일기장에 쓰는 것 같은 문체로 적어 내린 문장은 전부 류세이에게 보내는 연서나 다름없었다. 비일상 같은 일을 많이 겪는 사람이므로, 어쩌면 바보 같을 정도로 평범한 일상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까닭에서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이번엔 뭘 써볼까. 매일 반복되는 이야기를 쓰긴 좀 멋쩍었다. 류세이에게도, 토모코 본인에게도 재미없을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시콜콜한 감정을 적고 싶지도 않았다. 조금 고민하던 토모코는, 소설 초고를 완성했다는 문장을 시작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자세한 내용은 적을 수 없었지만, 무얼 쓰고 싶었는지는 적을 수 있었다. 이번에 내는 책에는 색깔을 먹는 어떤 요정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우리에겐 너무도 당연한 감각이 누구에겐 당연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증상이나 병없을 가지고 오고 싶진 않았어요.]

이야기는 도망쳐도 용서받을 수 있는 다정함과, 그 다정함으로 현실을 다시금 마주할 용기를 준다. 고등학생일 때 읽었던 ‘달의 마녀’ 이야기가 안전한 방공호가 아니라 현실에서 현실로 건너갈 수 있는 터널이었듯이. 토모코는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문장을 고르고 골라 가며 메일을 쓰고 있는데, 벨소리가 울리며 화면에 익숙한 번호가 떴다. 토모코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전화를 바로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잠시 후에 토모코가 심호흡하며,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했다. 사쿠타 류세이. 사랑하는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

 

 

“류세이 선배?”

“…….”

들려오는 조심스럽고도 나긋한 목소리에 류세이는 자기도 모르게 힘을 풀고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이를 악무느라 턱이 아려올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끙끙 앓는 소리를 들려줄 수는 없었다. 침대에 앉아 벽에 비스듬하게 기댄 채로 침묵을 유지하는 게 류세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니, 차라리 전화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본래라면 일본에 귀국했을 때가 되어서야 켰을 터다. 인터폴 형사인 탓에 개인 번호를 추적당할 가능성이 있어서, 핸드폰을 여러 개 만들어 둔 탓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류세이는 귀에서 잠시 핸드폰을 떨어뜨린 뒤, 입을 가리고 기침을 토해냈다. 이번 부상은 생각처럼 가까운 시일에 나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일선에 복귀하라는 상부 명령도 떨어지지 않은 채였고, 병원에서도 퇴원 이후에 절대 안정을 권고했다. 다 낫지 않은 상황이니 당연히 귀국은 불가능했다.

‘바보 같은 녀석. 어차피 가지도 못할 거면서 전화는 왜 한 거야.’

류세이는 한 번 더 자신을 질책했다. 아픈 탓에 정신력이 느슨해지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고통을 잊기 위해서 토모코의 목소리가 필요했던 걸까. 앉을 수도, 그렇다고 누울 수도 없는 상황에서 류세이는 마찬가지로 말을 할 수도, 전화를 끊을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잡음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에야 류세이는 토모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혹시 선배, 많이 다치셨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이 좋은 쪽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토모코였다. 게다가 몸을 비교적 덜 쓰는 사람이라도 숨소리에서부터 아픈 티가 역력했을지도 몰랐다. 류세이는 얕고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응.”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곤 그게 고작이었다. 어떻게, 어디서 다쳤는지는 당연히 발설할 수 없었고, 허용된 내용이라 하더라도 토모코에게 알리고 싶진 않았다. 소중한 사람에게 숨겨야 하는 것들이 늘어간다. 홀로 감당해야 할 마음은 스스로 다독여야 한다. 그걸 배워가는 과정이 어른의 길이라는 것을, 어른이 된 류세이는 알 수 있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가며 학교와 친구들을 지켰던 시절과는 비슷하면서도 자못 다른 책임감이 요구되었다. 어느 상황에 어떻게 판단하고, 어떤 결론을 내릴지 명확한 기준점이 생길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결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깔끔하고 좋게─그러니까, 류세이 본인이 느끼기에─일이 풀리기보단 뒷맛이 찝찝한 결과가 나오는 걸 보게 되는 순간이 더 많았다. 처음엔 잉가가 말릴 정도로 화를 내곤 했는데, 이젠 속으로 삭이며 넘길 줄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걸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는 걸까?

작은 한숨, 안도감에 가득 찬 한숨이 핸드폰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맥이 저절로 풀렸다. 토모코가 먼 타국에 있는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 앎이 토모코의 마음을 전부 앎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류세이의 표정엔 미동도 없었다. 눈에 물기가 차기 시작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응. 어느 정도.”

류세이는 팔을 간신히 들어 눈을 닦았다. 코도 몇 번이고 훌쩍였다. 불을 켜지 않은 집안은 어둑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탓에 집안 전체가 습했다. 류세이는 일본 여름 특유의 습기를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조차도 기억에서 희미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간 게 벌써 일 년 전이었다. ‘겨우’ 일 년밖에 안 됐는데 희미하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토모코.”

“네?”

“거긴 지금, 윽. ……낮이지?”

“맞아요. 오후 세 시예요. 거긴 밤이죠?”

“그런 거 같네. 아니, 사실 잘 모르겠어.”

피습 가능성 때문에 창도 자주 가려두었다. 핸드폰도 켜두지 않고 치료에만 몇 날 며칠 집중해서 시간 감각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류세이가 한숨을 내뱉었다. 상념이 흉터를 비집고 고름처럼 흘러나왔다.

“잘, 지내지?”

“그럼요. ……최근에 원고를 하나 끝냈어요.”

“……그래.”

머리맡에 있던 진통제와 소염제, 물을 입에 넣고 단번에 삼켰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머리맡에 두었던 쿠키를 입에서 녹여 먹였다. 침묵을 메우기 위해서인지, 토모코가 열심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최근 편의점에 갔다가 굉장히 맛있는 푸딩을 발견했다든지, 호기심에 들어간 카페가 특별한 커피를 팔고 있었다든지. 매번 메일을 통해 보내왔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토모코의 목소리로 발화되었다. 류세이는 혼곤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모코는 열심히 말을 잇다가도,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몇 번 말을 멈췄다. 몇 단어는 힘을 주어 말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왔던─물론 그전부터 이어져 왔겠지만─토모코만의 말하기 습관이었다.

“아, 앗.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을 많이 했죠. 류세이 선배 피곤하실 텐데.”

토모코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류세이는 바로 괜찮다고 다독여 주었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토모코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있죠, 류세이 선배.”

“응.”

“원고를 끝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어요. 아까도 그 생각을 했거든요.”

“……무슨, 생각?”

“후련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다고요.”

정말로 이상한 일이라고 토모코는 털어놓았다. 류세이는 그게 어떤 종류든 창작 활동과 연이 없었으므로 토모코의 심정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토모코가 글을 쓸 때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을 바치는지는 옆에서 지켜본 바로 알 수 있었다.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로 머리를 싸매며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렇게 괴로워하다가도, 불현듯 좋은 장면이 생각난다면서 밥을 먹던 중간에 서재로 뛰어 들어가기도 했던 것이다. 전신을 쿡쿡 쑤시는 통증도 회상을 막을 순 없었다. 토모코의 곁에서 보았던 장면들에선 잘 빨아놓은 이불 냄새가 났다. 눅눅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추억이었다. 그런 기억에 고개를 묻은 채로 류세이는 눈을 감았다.

“나도 그렇게 느낀 적 있어.”

“언제요? 아, 아프시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괜찮아. 이 정도는 ‘비밀의 스파이’ 씨한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토모코가 걱정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류세이는 거듭 괜찮다고 말했다.

“그냥……. 일이란 게 그렇더라.”

당연하게도 명확한 설명은 할 수 없었다. 토모코는 침묵했다. ‘일’도 ‘그런 것’도 전부. 얼버무려서 감춰둔 말뿐이었다. 류세이는 몸을 옆으로 기울인 채로 쓰러질 듯, 겨우 앉아있었다.

“토모코.”

“네.”

“우리, 힘내자. 되는 게 없는 것 같다고 해도.”

“네. 그럴, 게요.”

“응. 나도…… 힘낼게. 미안. 다음에 또 연락할게.”

“자, 잠깐만요. 류세이 선배.”

“왜?”

토모코가 더듬더듬, 많이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류세이는 아예 침대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깜빡였다. 넘친 눈물이 이불로 떨어졌다. “고마워.” 류세이가 작게 속삭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끊겼고, 류세이는 귀 위에 핸드폰을 얹어둔 채로 전원을 꺼버렸다. 어떤 자세로 있어도 불편한 나날이 며칠째 지속되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 나날이 류세이를 차츰 회복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촬 플레이리스트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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