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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화로운 치큐의 나날, 슈갓덤의 왕 기라는 왕이라면 방도 치워야한다며 한껏 의젓해진 모습으로 방을 치우고 있었다.

왕의 방은 신하를 시키면 된다는 다른 재상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위의 말과 함께 자신의 방이니 당연히 치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기라가 왕이 된 이후 집무실 서류들로 꽉 차 있었다. 왕이 된지 꽤 되었지만 아직도 서투른데다, 슈갓덤은 치큐의 중심이었으며, (장난으로 보낸 것 포함)다른 왕국에서 요청한 공문 서류들이 있다보니 이것저것 쌓여있는 왕의 집무실은 어디 발 디딜 곳이 없었다.

그러한 집무실을 천천히, 그리고 말끔히 치우던 기라는, 어느 서류뭉치에서 떨어진 하나의 작은 봉투를 발견했다.

슈갓덤의 인장으로 봉해져 있는 작은 봉투는 초대장같기도 하였고, 편지같기도 하였다. 슈갓덤의 인장이 있으니 초대장이겠거니 싶지만서도 최근에 기라는 초대장을 보낼만한 일도 없었고, 공문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킹스 핫라인을 이용하는 왕들이기에 초대장은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전 왕이었던 라클레스가 보내지 못한 무엇인걸까 싶어, 기라는 오랜만에 형을 생각하며 굳게 봉해둔 인장을 뜯었다.

인장을 뜯으니 나오는 것은 장문의 글이었다. 초대장에 쓸만한 길이는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 같았다. 일부는 꽤 오래된 듯 종이 한 구석이 노랗게 변해있었고, 일부는 최근에 쓴 듯 비교적 빳빳해 보였다. 글씨체는, 그리운 형의 글씨였고, 받는 사람은 기라였다.

 

 

기라에게.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다면, 내 계획이 성공하여 네가 왕이 되어 슈갓덤을 다스릴 때겠구나. 아니, 그 때여야만 해.

이 글을 쓰는 나는, 이 태풍을 끝낼 계획을 세우고 있어.

아버지가 너에게 레인보우 쥬루리라를 먹이고 난 뒤 재료를 알았을 때 나는 진실을 알았어. 우리들, 하스티의 운명을. 그리고 아버지의 계획과 내가 해야할 일을.

우충왕은 이 별을 파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슈갓덤의 왕에 오르는 자들은 그러한 우충왕의 아래 몸을 낮춰야 했어. 그 굴레는 2000년 전부터 시작되어 온, 우리들의 짐. 겉으로 보기엔 이 별은 매우 평화로웠지만, 우리들은 언젠가 우충왕에게 이 별을 바쳐야 한다는 운명에 있었지.

 

그리고 아버지는 그 운명에 맞서고자 하셨고, 뒤늦게 깨달은 나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어.

 

우충왕은 모든 우주를 꿰뚫어보는 자. 우주 위에서 모든 걸 지켜보는 자였지. 그의 눈을 속이는 것은 쉽지 않을거야. 그래서 나는 철저하게 나를 숨기기로 했어. 수천년동안 치큐 위에 몰아치는 태풍의 눈에 거하고 있는 우충왕에게서.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는지, 이 때부터 투박하지만 이전 장 보다는 빳빳한 종이에 적혀있다.)

나는 용서받지 말아야 할 왕이 되어야 한다. 너는 슈갓덤 최악의 왕이자 폭군인 나에게 맞서 싸운 영웅이 되어야 하고, 나는 백성을 도구로 삼아 우주를 지켜낼 슈갓덤 역사상 최악의 왕이자 폭군이 되어야 한다.

설령 네가 나의 진심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나를 용서하지 말아줘. 이 모든 일의 결말이 태풍의 눈을 뚫어 우주를 구한 것이더라도, 그 과정에 흘린 수많은 피들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이며 치큐 곳곳에 일어난 희생은 내가 일으킨 것이니, 이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기에 나는 최악의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리라.

점점 견디기 힘든 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은 곧 이 태풍의 끝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줘.

소중한 내 동생 기라. 좋은 형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해. 그렇지만 너라면 슈갓덤을 훌륭하게 통치할 수 있을거라 믿어.

너의 날개가 꺾이지 않기를, 너에게 찬란한 슈갓의 가호가 영원토록 있기를.

 

.

.

.

 

“서방님, 반가운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곳칸의 추운 노역장에 스즈메의 밝은 목소리가 울리자 한켠에서 라클레스가 몸을 돌린다.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어느정도 참작하여 노역형으로 감형되었기에 줄곧 감옥에만 있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면회를 오는건 참 오랜만이었다.

노역장 입구로 들어오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멋쩍게 웃는다. 손에 무언가를 잔뜩 가져온 채로. 그 실루엣을 본 라클레스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기라.”

“형, 오랜만이야.”

 

멋쩍은 웃음으로 헤헤 웃는 동생이 참 귀엽더랬다. 어릴적에도 저렇게 헤헤 웃는게 참 귀여웠는데, 여전하구나, 너는.

기라의 방문에 맞춘 것인지 모르포냐의 휴식 시간 소리에 스즈메가 어느샌가 차가운 돌 위에 담요를 깔고 차를 기라와 라클레스 앞에 내오더니,

“서방님, 도련님~ 스즈메는 잠깐 자리를 비켜줄게요~”

하고는 잠시 자리를 비운다.

 

“형, 서류를 정리하다가 이 편지를 발견했어.”

기라가 건네준 건 미래의 제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 편지마저 기라에게 잘 전달되었구나.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릴 적에 형이랑 성 곳곳에 비밀편지 숨겨두면서 놀았던 생각 나더라.”

“하하, 맞아. 그 때 재밌었지. 네가 첫번째로 숨겼던 편지가 형을 놀리는 거여서 내가 화내기도 했었고 말야? 그러고서 기라 바보 써놓은게 나였고…”

라클레스가 어릴 적 추억에 젖은 듯 곳칸의 하얀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라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다시 입을 연다.

“형, 아직도 돌아올 생각은 없어?”

“응? 어딜 말하는거야?”

“모른 척 하지 말고, 슈갓덤으로 돌아가자, 응?”

“기라, 나는 돌아갈 수 없어.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왕이다. 너도 알잖아.”

“형, 나도 다른 왕들도 용서했어. 백성들도 그럴거야. 그러니까,”

“기라, 결과가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는 수많은 희생이 있었어. 그 희생을 만들어 낸 건 나고, 그 희생을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어. 나의 욕심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편하게 있을 수는 없어.”

“형은 결국엔 우리와 함께 싸워서 우주를 구했잖아. 그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치룬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돌아가자.”

“미안해, 기라.”

기라는 한동안 말없이 아직도 따뜻한 찻잔만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갈 수 없다고 하면 자주 찾아올게.”

“그래주기만 해도 고마운걸.”

“가끔 선물도 가져올게.”

“그건 안돼.”

“아 왜!”

“리타가 면회 때 뭐 갖고 오는건 안된다고 한 걸 들은거 같아. 그게 다른 나라 왕이라고 하더라도..?”

 

“악 진짜!”

기라가 뿌우, 입술을 내밀며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라클레스가 푸핫, 웃으며 미소짓는다. 태풍이 걷힌 어느 날이었다.

특촬 플레이리스트 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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